직장인을 대상으로 마음을 치유하는 비즈니스에 종사하는 한 신경정신과 의사가 이런 말을 했다. “대기업 임원 조찬 간담회에서 강연을 했는데, 강연을 마치고 나가려니까 ‘제발 내 얘기 좀 들어달라’는 임원들이 줄을 섰더군요.”
사회적 지위와는 관계없이 사람들은 저마다의 상처와 아픔을 가지고 있다. 근래 2~3년간 ‘힐링’이라는 단어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이 회자됐다. 아픔과 스트레스가 완전히 사라지는 상태가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별것 아닌’ 노력을 통해서라도 잠시나마 위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전 세계인들은 지금 무엇을 통해 마음을 다독이고 있는지 ‘마음의 힐링’ 편에서 살펴보자.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채색 <자료원: www.madamecitronnade.com>
화창한 오후, 파리의 최신 트렌드를 한눈에 알 수 있는 마레지구의 한 아틀리에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진지한 표정으로 무엇인가에 집중하고 있다. 이들의 손에는 다양한 색채의 색연필과 사인펜 등이 쥐어져 있다. 조용한 가운데 각자 앞에 놓인 그림에 자기만의 방식으로 아름다운 색채를 입힌다. 바로 요새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채색(Coloriageanti-stress)’에 열중하고 있는 것이다.
출판업계를 놀라게 한 어른들을 위한 채색 앨범
이미 그려져 있는 밑그림에 색연필로 예쁜 색을 채우는 ‘색칠공부’는 그동안 어린아이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 별것 아닌 것 같은 소일거리에 마음을 치유하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지면서 채색이 아트 테라피(arttherapy)의 일환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스테인드 글라스를 테마로 한 채색 앨범 <자료원: KOTRA 파리 무역관 >
영미권에서 시작된 채색을 통한 마음 치유는 2012년 아셰트(Hachette) 출판사에서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100가지 채색 앨범(100 ColoriagesAnti-Stress)》을 출간하면서 프랑스에 도입됐다. 출간 당시만 해도 출판사조차 이 책이 큰 성공을 거두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스테인드 글라스, 만다라, 정원의 식물, 풍경, 컵케익, 관광명소 등 다양한 테마로 출간된 채색 앨범은 시장에 내놓자마자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다. 대표 주자인 아셰트에서 출간한 것만 해도 1년 동안 30만 부가 팔리는 등 놀라운 판매량을 기록했으며, 2014년 상반기 취미·실용서적 베스트셀러 15권 중 5권이 채색 앨범일 정도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이에 힘입어 아셰트는 올 가을에도 새로운 테마의 채색 앨범을 출간할 예정이며, 벌써부터 내년 출간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데 여념이 없다.
채색 앨범의 인기를 느껴보고 싶은가? 그렇다면 지금 파리의 큰 서점 아무곳에나 방문해보라. 매장 입구, 통로, 계산대 옆 등 잘나가는 베스트셀러만 놓인다는 전략적 포지션마다 빼곡하게 자리 잡은 채색 앨범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취미 트렌드, 재미+힐링
파리 최대 규모 취미용품·서적 판매점 BHV의 메인 통로에 전시된 채색앨범 <자료원: KOTRA 파리 무역관 >
어린아이들의 놀이로만 알려졌던 ‘색칠공부’가 어른들 사이에서까지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전문가들은 빠른 속도로 발전해가며 점점 더 복잡해지는 현대 사회를 그 원인으로 꼽는다. 눈부신 속도로 발전을 거듭하는 현대기술은 매일 새로운 것을 내놓고 있으며, 사람들은 이런 기술 발전을 따라잡고 적응하기 위해 적지 않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다. 기술 발전으로 인한 스트레스 또한 적지 않다.
가까운 예로 스마트폰을 들어보자. 불과 몇 년 전 혜성같이 등장한 스마트폰. 스마트폰기술로 인해 언제 어디서나 인터넷 사용이 가능해지면서 우리 생활은 180도 달라졌다. 길을 가다가도 궁금한 것이 생기면 주저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검색해서 확인할 수 있고, 지구 반대편에 있는 가족들과도 실시간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하지만 스마트폰의 스마트한 사용법을 배우기 위해 우리는 많은 에너지를 쏟고 있으며, 잠시도 쉬지 않고 울려대는 스마트폰으로 인한 스트레스 또한 무시할 수 없을 정도가 됐다.
그런데 채색 앨범을 펼치고 색칠을 하는 과정은 어떨까? 밑그림에 고운 색을 하나하나 덧입히며 우리는 잠시 동안이라도 스크린에서 눈을 떼고 눈앞의 색에 집중할 수 있다. 그 작업을 통해 흐트러져 있는 정신을 차분히 정리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다. 그림에 집중함으로써 일종의 명상을 하는 것이다.
아트 테라피스트 장 피에르 로욜(Jean-PierreRoyol) 박사에 따르면, 점점 복잡해지는 생활에 지친 현대인들의 좀 더 단순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려는 욕구 또한 채색 앨범 판매 붐에 일조했다. 어른이 되어버린 지금, 돌아보면 순수했고 계산이 없었던 어린 시절은 행복한 기억으로 남게 마련이다. 색칠공부가 상징하는 어린 시절의 단순함과 순수함, 행복에 대한 향수가 수많은 어른의 손에 색연필을 쥐어주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 10유로 미만인 채색 앨범 <자료원: KOTRA 파리 무역관 >
불경기도 채색 붐에 한몫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불경기가 지속되고 실업률이 10%를 훌쩍 넘는 등 고용 환경이 점차 악화되고 있는 경제 상황에서 프랑스인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함으로 지갑을 꼭꼭 닫아버렸다. 그런 그들에게 적은 비용으로 즐길 수 있는 여가활동은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악기 연주나 스포츠 등의 여가활동은 시간과 장소에 제약이 있고, 필요한 장비를 구매해야 하거나 레슨을 받아야 하는 등 비용이 꽤 많이 소요된다. 그러나 채색 아트의 경우 5~15유로 정도 되는 채색 앨범과 색연필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즐길 수 있다(에르메스 등 일부 명품 브랜드에서 출시한 200유로 가까운 럭셔리 채색 앨범은 무척 예외적인 경우다). 약간의 집중력 외에는 대단한 기술이 필요하지 않아 부담 없이 시작할 수 있는 것도 큰 장점이다.
100% 스트레스 치유 효과를 보장하는 채색 아트
그렇다면 채색 아트에 정말로 치유 효과가 있을까? 채색 아트를 즐기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처음에는 과연 색을 칠하는 단순한 행위만으로도 스트레스 해소가 가능한가에 대해 회의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호기심으로 시작하게 된 사람도 예외 없이 놀라운 휴식과 힐링을 경험하면서 점차 몰입하게 된다고 입을 모았다.
얼마 전부터 채색 아트에 푹 빠진 파워블로거 비르지니 시트로나드(VirginieCitronnade)는 “그림을 앞에 놓고 아름다운 색으로 채색하면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스트레스로 자극받고 흥분됐던 정신이 차분하게 가라앉으면서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조용히 채색에 빠져들면서 집중력이 향상되고, 일상의 스트레스에서 잠시 벗어나 다른 세상을 경험하는 것 같아서 점점 더 채색활동의 매력에 빠져들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 외에도 수많은 네티즌이 채색 아트를 통해 아름다운 색채에 집중하면서 행복감과 평온함, 그리고 빡빡한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꽃과 나무를 테마로 한 채색 앨범 <자료원: www.madamecitronnade.com>
아트 테라피스트이자 채색 아트 전문가인 로랑스 보시(LaurenceBosi) 박사는 현대인의 마음 깊은 곳에는 선사시대 동굴 속에서 벽화를 그리던 예술가로서의 창조 본능이 남아 있다고 설명한다. 타고난 재능이나 심화된 예술적 기교가 없는 평범한 사람도 채색 아트를 통해 약간의 노력만으로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창조해내면서 본능 충족의 만족감을 얻는 것이다. 완성된 작품을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으로 공유해 주변 사람들의 격려와 인정을 받음으로써 일종의 자아 성취감도 얻을 수 있다.
작품을 완성시키면서 느끼는 즐거움과 이를 통해 얻게 되는 마음의 평화.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 바쁘고 빠르게 돌아가는 우리 한국인들에게 꼭 필요한 것 아닐까? 잠시 동안만이라도 컴퓨터 화면에서 벗어나보자.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손에 색연필을 들고 예술가가 되어보자. 힐링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님을 곧 깨닫게 될 것이다.
이민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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